조제가 심심치않게 들어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. 모르는 번호는 왠만해선 받지 않는편인데 아무 생각없이 전화를 들었더니 예쁜 아가씨 목소리.. '*** 선배님이시죠?'
대개는 제2금융권이나 카드모집인이나 뭐 그런 쓰잘데기 없는 여자들인지라 받으면서 곧 후회하게 되는 편인데 이건 또 뭐냐? 선배님? 이것들이 작전을 이렇게 쓰나?
그런데 이야기가 다르다. '저 **반 후배 백**인데요~' 하는데 보니 아는 이름이네? 내가 이친구를 한두번 봤던가? 아닌가? 대학시절 살다시피했던 실험실 후배인거다. 이쪽 후배들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무조건 반말이 튀어나온다. 아가씨에게 미안한 일이지만...
다음주 정도에 신입생환영회가 있는데 오실 수 있냐고 한다. 신입생? '올해도 신입생이 있나?'하고 묻게 된다. 약대가 6년제가 되면서 일반 고등학교 졸업자는 곧장 약학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.
2년제 대학 이상을 나와야 입학할 수 있게 되었으니...신입생 연령이 엄청 높아졌다는 얘긴데...연령뿐 아니라 최소한 대학생이거나 대학졸업자들일테니...그래서 대학 동아리들도 거의 다 신입생도 못뽑을거라고들 했는데? 그래도 신입생은 있는 모양이다. 일반 동아리가 아니고 '실험실'에 소속되는 것이라서 좀 나은가?
다음주 토요일이면 특별한 일정은 없는것 같다. 알았다고, 시간을 내 보겠다고 대답을 하다가 보니 '아~ 실험실 모임에 안나가기로 한게 벌써 몇년인데...' 싶다. 새로온 교수와 박터지게 싸우고 졸업생들이 모두 등을 돌려버린게 벌써 10년이 넘었지 싶다. 그인간이 아직도 건재할건데...
그래도 후배들이 정성스럽게 연락하는데 그 소리 하기도 미안하기는 하다. 차마 그런 말은 하지 못하고 그냥 덧붙여서 '시간을 내보겠고, 정 안되면 다시 전화 하겠다'고 둘러대고 만다.
그런데 이 아가씨 갑자기 엉뚱한 소릴 한다. '저희가요~ 80년대 실험반 앨범을 찾아냈거든요~' ...억! 뭐?! 약국안인데 갑자기 폭소가 터져나왔다.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앨범이 순식간에 또렷하게 펼쳐진채 보이는거다.
'어?! 그거 앨범에 지저분한 낙서들이 무지 많을건데?' 그랬더니 이 아가씨 어려운것도 잊어버리고 깔깔대며 한참을 웃는다. 어린시절에, 장난끼로 똘똘 뭉쳐 살던 대학 2,3학년 시절에 개구쟁이들 모여앉아서 개발 새발 그림 그리고 글씨쓰고...차마 남들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마구잡이 낙서를 해댔던 그 앨범....그걸 어디서 찾아냈다고?
그러고보니 졸업하고 스물대여섯해 지나가면서 그 앨범의 존재나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는 생각이 든다. 얼마나 소중한 사진들인데...얼마나 소중한 기억들인데...근데 그게 대체 어디 쳐박혀있었다가 이제서야 나타난거지?
이십대초반의 이 아가씨들이 그 앨범을 보고 얼마나 낯뜨거웠을지, 얼마나 킬킬 댔을지 전화를 들고 있으면서도 민망해진다.
이미 회사에서 이사니 부장이니 사장이니 하고, 커다란 약국의 주인으로 있는 이친구들은 아마도 그 시절의 그 장난끼어린 낙서들을 까마득히 잊고 있을게다. 어쩌다가 후배들과 인연을 끊지 않고 있었던 덕에 내가 제일 먼저 입수하게 된 것이리라
'어떻게 할까요? 언제 서울오시면 드릴까요? 아니면 갖다 드리라고 할까요?' '수고스럽지만 갖다 주시요. 서울 갈 기회가 좀처럼 없을것 같으니...' 이래놓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.
앨범이 오면 그 자체를 사진을 찍어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? 개개의 사진은 스캔하면 될것같고...이래저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.
스무살 시절, 그 푸르던 대학생 시절의 앨범이라...내게도 시퍼렇게 존재했던 그 젊음의 기록들이라...언제 올지 벌써부터 기다리며 가슴 설레고 있다.
0 comments:
Post a Comment